중파방송이 중단되거나 송신소가 하나 둘 씩 폐쇄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약 10년 전에 불현듯이 달려든 취미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BCL' 이라는 것이다. BCL은 broadcasting listener라는 뜻인데, 사전적 의미로는 그냥 '방송 청취자' 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을 청취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더 쓰이고 있다.
내가 그쪽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천만냥에서 싸구려 라디오를 구입하게 되고 나서 였다. 그 라디오는 AM/FM 기능 외에도 SW라는 항목이 있길래, 이게 뭔가 하고 알아보다가 단파방송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뜬 나는, 싸구려 라디오가 아닌 좀 더 수신 능력이 좋은 라디오를 구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지금은 해외직구나 구매대행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단파방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11~2012년 즈음에는 해외직구라는 개념 자체도 희박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단파방송 커뮤니티로 유일했던 'KSWC 한국단파클럽' 의 장터 게시판에서 라디오 수신기를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단파라디오를 구했는데, 그것이 TECSUN의 PL-660 이었다.
PL-660으로 많이 들었던 방송은 'NHK 월드 라디오 일본' 의 한국어 방송 시간이었다. NHK가 좋아서 들은게 아니라, 단파 방송 중에서 그나마 재미있는 코너를 편성한 건 NHK 월드 라디오 뿐이었다. 그 외에는 닛케이 라디오의 '뮤직 어플리' 코너를 주로 들었다. 아, 북한으로 쏘는 대북방송도 들었다. 내용은 자세히 썼다간 큰일날 것 같으니 여기에 서술하지는 않지만, 여러 대북방송 중 한 채널은 나름 들을만 하였다. 그 외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중국국제방송은 중국어 학습 방송만 주로 편성되어 있어서 재미가 없었고, VOA 미국의 소리는 뉴스만 하고, 시오카제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만 다루니까 말이다. KBS 월드 라디오는 일본어 방송 시간때 가끔 들은 적이 있었다. 방송 대기 음악과 시작 시의 시그널 음악이 아직도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그때도 필자가 나름 일본어 청해 능력이 있었는지 아나운서가 일본어로 뉴스를 읽어줄때, '이건 무슨 내용이겠거니' 하고 대강 어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5000Khz나 10000Khz에서 나오는 시보(時報) 방송이나 5858Khz 즈음에서 나오는 해양기상방송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전파 출력이 약한지 깨끗하게 수신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게 단파방송 쪽에 관심을 가지던 필자는, 중파DX라는 분야로 관심을 옮기게 되었다. DX는 쉽게 말해서 '원거리 수신'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파방송은 밤이 되면 국내의 라디오 방송만이 아닌 중국과 일본의 라디오 방송도 잡힐때가 있다. 잘 잡히던 외국 방송은 대표적으로 1413Khz의 큐슈 아사히 방송과 873Khz의 NHK 구마모토 제2방송이었다. 다만 873Khz는 북쪽의 방송과 겹쳐서 듣기가 좀 어려울때가 많았다.
이렇게 단파방송이나 중파DX에 심취하면서,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 쏘는 전파를 우리 집 라디오 수신기로 잡아낸다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마치 아득한 밤 하늘 아래에 서서, 빛나고 있는 별들을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TECSUN의 PL-880을 해외구매대행으로 구입한 것을 끝으로 나는 BCL 취미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어느새 5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이제는 인터넷 상으로 수신하는 것이 더 깨끗하게 들리기도 하고,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되지 않아서 기껏 구입한 라디오 수신기들은 서랍 속 한 귀퉁이만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떠올린다. 그렇게나 무언가에 진심으로 파고 들었던 낭만적인 시간들을... 중파의 입지가 갈 수록 줄어들때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억 속 파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