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1년에 한 두번씩 무슨 '논술능력평가' 라는 시험 비스무리 한 게 있었다. 논제를 2개 제시하고, 이에 대해 약 700~800자 정도의 글을 원고지 형식의 답안지에 작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평가가 계속되고 있는지는 이미 학업을 떠난 상황이라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이게 무슨 쓸데없는 일인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수업을 빼먹는 것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논제를 어떻게 약 2시간 안에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답안지도 그냥 괘지(罫紙) 같은 것이 아닌 원고지 형태라서, 틀렸을 경우 원고지 교정부호를 써야 한다. '돼지꼬리 땡땡' 같은 것 말이다. 화이트(수정 테이프)가 암묵적으로 허용이 됐는가의 여부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데 원칙적으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꾸역꾸역 글자수를 채우려고 애썼다. 일단 답안지에 바로 적으면 틀렸을 때 수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문제지 뒷면에다 초고(草稿)를 쓰고 나중에 답안지로 옮겨적었다. 그리고 최대한 돌려 말하거나, 길게 늘어뜨리거나, 속담 같은 인용구를 삽입하는 등 글자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다 동원했다. 물론 지리멸렬하게 늘리기만 하지는 않고 후반부에는 나름대로 내 견해나 주장도 제시했다. 그렇게 하니 몇 번은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수상했다기 보다는, 반 친구들이 그냥 대충 쓰고 책상에 엎드려 자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필자의 '장문(長文)' 습관은 그때부터 싹수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안 보고 산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서,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이나 스마트폰 화면이 책보다는 더 친근하기만 하다. 하지만 소위 '뻘글' 같은 초단문 형식의 글이나, 초성체 같은 것에는 여전히 나에게 괴리감이 든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최대한 글을 길게 늘어뜨리려는 습관이 계속 나오고 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도 가능한 지키려고 용을 쓰고 있고,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없도록 문장에 '주어'를 가급적 생략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독자가 봤을 때는 뭔가 내 글이 가독성이 떨어지고, 어려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필자의 성격은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게 끔 미주알고주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열거하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추가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래서 다소 피곤한 면이 있지만,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성격을 바꿀 수도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필자는 수다를 떠는 것을 기피한다. 수다를 떨 만한 주제도 없고, 한번 입이 트이면 생각보다 많은 말이 튀어나와서 괜히 하면 안 되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나중에 심신이 지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글쓰기는 말하기보다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하고, 언제든지 다시 읽을 수 있고, 말하는 것에 비해 덜 지치기 때문이다. 또한 말하기는 상대방의 말을 잘못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글은 머릿속으로 읽어들이는 것이니 말하기에 비해 주장 파악도 명료하다. 이것이 내가 영상·음성 매체보다 텍스트 매체에 더 마음이 이끌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