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령층 애니메이션 더빙이 줄어든 이유를 추측해본다


케이블TV나 IPTV는 옛날에 비해 방송국도 많아졌고, 채널도 수두룩하다. 각양각색의 장르를 가진 채널들 중에서,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만화 채널에만 관심이 있다. 지금은 유아 채널로 전락해버렸지만,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투니버스'는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채널이었다. 투니버스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을, 심지어 15세·19세 시청등급인 고연령층 애니메이션 마저도 한국어로 더빙하여 방영하는 등 우리말 수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투니버스 뿐만 아니라 애니원, 애니맥스, 애니박스 등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각종 애니메이션 채널들의 한국어 더빙 노력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2023년 현재, 한국어 더빙이 이루어진 고연령층 애니메이션은 예전과 달리 크게 줄어들었다. 아니,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 이유가 뭔지 필자가 감히 추측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강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사회가 자유분방 해지기는커녕 온갖 잣대를 들이대면서 검열만 늘어나고 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카툰네트워크 재더빙 방영 때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2005년 투니버스 방영 당시 케로로는 '7세 이상 시청가능' 등급이었다. 그러나 2019년 카툰네트워크에서 재더빙으로 방영할 때는 '12세 이상 시청가능' 등급으로 상승하였다. 그러면 시청 등급이 오른 만큼, 투니버스 방영 때 커팅된 장면들이 무삭제로 송출됐을까? 아니다. 오히려 투니버스 때 잘만 방영되었던 장면이 카툰네트워크 방영 때는 편집되기도 하였다. 시대를 역행하는 애니메이션 검열 행태가 빚어낸 촌극인 것이다.

두 번째는 자막 동시방영이 더빙보다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애니플러스'를 필두로 하여 이제는 일본 현지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이 약 1주일 정도 지나면 국내 애니 채널에서도 자막과 함께 시청할 수가 있다. 한국어 더빙을 하는 데에 드는 돈과 시간, 노력에 비하면 자막 동시방영 쪽이 훨씬 비용이 저렴한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다보니 현재는 만화 채널들이 굳이 '한국어 더빙' 이라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세 번째는 더빙보다 자막을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더빙을 하면 원작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원어 자막이 아닌 더빙을 선호하는 편이다. 자막판은 음성 뿐만 아니라 자막에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시청 시에 더 피곤하다. 그리고 자막판은 거의 로컬라이징 없이 원작을 따라가는 반면, 더빙판은 로컬라이징을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원작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또한 한국어 더빙은 방영 당시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희소성도 있다. 원작의 VOD와 달리, 한국어 더빙 VOD는 판권 문제 등으로 인해 잘 서비스되지 않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달 전 웹하드를 돌면서 더빙 애니를 수집한 적이 있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그 이유에는 인터넷 상에서 보기 어려워진 더빙 애니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필자는 더빙 애니가 '우리말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예술' 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예술 속에는 수많은 캐릭터들에게 우리말을 입힌 수많은 '성우'들이 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연예인 더빙 수준만큼이 아닌 이상, 약간의 어설픔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원작보다 우리말 더빙을, 한국어 더빙을 계속 선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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