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달력을 구걸하고, 성취감과 자괴감이 들었다.


 매년 12월 1일이 되면, 필자는 별로 가지도 않는 주거래은행의 지점에 간다. 송금이나 전자상거래, 공과금 납부는 스마트폰 뱅킹으로 해결할 수 있고, 현금이 필요하면 그냥 가까운 은행 아무데나 간 뒤 ATM 기계에서 카드로 인출하면 된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꼭 주거래은행의 창구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되는 이유는 뻔하다. 바로 달력을 구걸해야 되기 때문이다.

은행 달력은 예전부터 '재물운'을 부른다는 이상한 통설이 있다. 물론 필자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다. 돈은 나가는 곳만 많아졌고, 들어오는 곳은 사실상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은행에 달력을 구걸하러 가는 것일까.

일단 은행 달력은 '무료'다. 물론 인터넷으로도 벽걸이 달력을 만원도 채 안되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돈 주고 사는 것보다는 무료로 얻는 게 훨씬 이득인 것은 당연하다. 무료로 얻을 기회가 있는데 이를 마다하는 것은 손해라고 본다.

그리고 통장정리를 할 '좋은 핑계 거리'가 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필자는 스마트폰 뱅킹으로 사실상 모든 은행 업무를 처리한다. 종이통장도 있지만 이걸 쓸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통장정리도 별로 할 마음이 들지 않는데, 이것이 달력을 구걸하기 위해 은행 창구에 갈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또한 은행 달력은 '레어 아이템'이다. 각각의 은행마다 연말에 찍어내는 것 말고는 추가로 생산하지도 않고, 팔지도 않는다. 이때문에 중고나라 같은 곳에서는 은행 달력을 되팔이하는 인간들도 있다. '재물운' 미신과 겹쳐서 어떻게든 은행 달력을 구하려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매매 행위가 가능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무튼, 은행 달력의 효능(?)을 대충 파악했으니 필자는 달력을 구걸하러 가보기로 하였다. 주거래은행의 지점은 필자의 자택으로부터 15분 거리에 있다. 쉬지 않고 걸으며 횡단보도 신호까지 포함해서 15분 거리다. 아무튼 지점에 들르니 문지기가 있다. 나에게 무슨 업무로 왔냐고 묻는다. 필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통장정리를 하면서... 달력 좀 있나 물어보려고요.'


문지기는 내가 달력을 구걸하러 왔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번호표를 대신 뽑아주었다. 시간은 11시 55분. 내 앞에서 업무를 보는 고객은 1명 밖에 없었다. 몇 분 기다리니 내 순서가 되었다. 창구로 간다. 은행원이 무슨 업무로 왔냐고 묻는다. 일단은 통장정리를 하러 왔다고 둘러댄다. 달력 구걸은 마지막에 할 생각이다. 은행원은 '압축기장'을 할 거냐고 묻는다. 1년 간 정리가 안 된 기록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부 기장해달라고 하였다.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로 뭉뚱그리면 나중에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은행원은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기계에 통장을 넣고 기장(記帳)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ATM 기계에 가서 정리하면 되지 않냐고 반문한다. 결국 나는 방문 목적을 실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려고 했는데, 마침 지금이 달력 시즌이잖아요. 그래서 달력 좀 없나 물어볼려고 창구에 온 거죠.'


창구 직원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내 진짜 목적이 '달력'이란 걸 파악한 것이다. 통장정리는 1년 간 되지 않은 상태에, 그것도 ATM 기계에서 정리하는 게 아닌 바로 창구로 왔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금방 내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연기에 둔했다. 어느덧 기장이 끝나고, 은행원은 바로 내가 원했던 달력을 종이 가방에 넣어서 준다. 벽걸이 달력이었다. 탁상 달력은 이미 다 소진됐는지, 아니면 지점 방침이 둘 중 하나만 가능한 것인지... 받지 못했다. 작년에는 둘 다 받았는데 말이다. 나는 감사를 표한 뒤, 통장과 달력을 가지고 은행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만 부는 겨울이 되어서 그런지, 내 마음 속에서는 달력을 어떻게든 구했다는 성취감과, 이렇게까지 해서 달력을 구할 필요가 있었냐는 자괴감이 한데 뭉뚱그려져 '압축기장' 되고 있었다.

매년 11월 말~12월이 되면, 은행에 찾아가 달력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달력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달력 구걸 행위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으로 말이다. 그러다보니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달력 거지'라 부르며 비하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과도하게 달력을 요구하는 행위는 잘못됐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조롱과 비하를 한다고 해서 근절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달력 배부를 예약제로 바꿔서 희망하는 사람에게만 우편이나 지점 방문으로 수령하게 하든가, 아니면 1000원이라도 받고 파는 판매제로 바꾸든가 해야 되지 않겠나. 지금과 같은 배포 방식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달력 거지'는 해마다 출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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